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 영화/역사 (문단 편집) == [[1990년대]] == 다만 당초 직배허용 당시에는 한국영화인들이 대거 반발했기 때문에 직배제도 도입 이후로도 직배영화 상당수가 재개봉관이나 소규모 상영관을 통해 개봉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상만큼의 파급력을 보여준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사랑과 영혼]]이 흥행하면서 주요극장들도 직배영화를 상영하면서 한국영화에 다시한번 결정적인 타격을 날리며 점유율이 20% 아래로 떨어지는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1991년]]에는 [[장군의 아들]]의 영향으로 점유율 20%를 유지했지만 [[1992년]]에 18.5%를 기록했을 정도이며 이 때문에 [[남부군]]같은 탈이데올로기적인 작품 등장하고 [[파업전야]]같이 의의가 있던 작품들이 개봉되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1990년대]] 중반까지도 한국영화에 대한 전망은 몹시 암울하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1993년]] 미국의 《[[쥬라기 공원]]》의 대히트에다가 《[[서편제(영화)|서편제]]》가 단관개봉만으로도 '''100만 명'''이 넘는 당시 초유의 기록을 수립하는 일이 벌어졌고, 시민단체의 감시아래에서 스크린쿼터 준수여부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다. 서편제의 대흥행으로 인해서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었고, 케이블TV가 본격적으로 개국하면서 주요 대기업들이 영화에 눈독을 돌이기 시작하며 대자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영화계에 진출함에 따라 한국영화의 스케일 또한 커지기 시작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또 노태우 시절부터 운동권 인사들이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진출하면서 인재가 몰리게 되었다. 즉, 영화의 제작과 배급에 있어서 과거의 주먹구구식 관행에서 탈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프류듀셔가 본격적으로 등장함에 따라 한단계 더 높은 기획력을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기획자의 등장과 대자본의 참여속에서 영화인들은 그동안은 엄두도 못내던 실험적인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영화에 컴퓨터 그래픽을 본격 도입한 《[[구미호]]》처럼 꽤 실험적인 시도도 많았고, 한국에서 절대 만들어질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판타지, SF 장르도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 장르가 흥행과 비평에서 대박을 터진 작품은 [[1996년]]에 개봉한 《[[은행나무 침대]]》로, 탄탄한 각본과 제대로 된 기술력만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우리의 기술로 제작되고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비록 [[시망]]하긴 했지만 최초의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퇴마록(영화)|퇴마록]]》도 나왔다. 또한 [[강제규]], [[강우석]], [[박찬욱]], [[봉준호]] 등 21세기 들어 흥행감독이라 불리는 이들, [[송강호]], [[한석규]]처럼 지금도 건재한 톱스타들이 데뷔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여고괴담]]》처럼 새로운 감각의 공포영화도 출현하여 질적으로도 상향되었다. 물론 영화점유율이 반등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최악에서 빠져나왔을뿐이었지, 여전히 점유율 20%대에 그치는 불황기인것은 마찬가지라서 비디오 영화에 의존하는 비율도 높았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졌을때 삼성과 대우 등 주요 대기업들이 영화업에서 철수하는 악재가 잇따라 터졌고, 미국의 압력에 의해 스크린 쿼터제 폐지 및 축소 압력이 고조되는 등 국내영화계도 엄청난 타격을 입을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지만 CJ와 롯데 등 남은 대기업들이 한국영화의 성장가능성에 올인했고, 이에 발맞추워서 멀티플렉스인 [[CGV 강변]]이 강변 테크노마트에 처음 등장한 이후로 멀티플렉스형 영화관이 본격적으로 사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CGV 강변 개업은 평범한 영화관 하나 생긴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좋든 나쁘든 CGV 강변으로 인해 한국 극장 시장 자체의 판도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특히 극장 체제 개편의 궁극적인 의의는 자본 순환이 가능해진 점이다. 문민정부까지의 한국영화는 지방 극장주가 영화의 상영권을 사는 형식으로 자본을 먼저 대고 티켓 수입은 자신들이 챙겼다. 제작자들은 선금을 받아서 돈을 벌 수는 있었으나 추가 수익은 없으니 차기작을 만드려면 다시 극장주에게 투자를 받고...수익은 또 극장주가 가지고...이랬던 것이 영화 시장 개방으로 해외 직배사가 한국 시장에서 영업을 할 수 있게 되고 현재와 같이 투자사로부터 자본을 받아 제작자가 수익을 내고 그 수익을 다시 투자사로 돌리는 순환이 가능해졌다. 물론 처음에는 외국영화에만 한정될 뿐이었기 때문에 한국영하의 성장에는 악영향을 끼쳤고 이것이 [[1990년대]] 후반까지도 이어졌지만. 배급 체제 개편은 작품의 질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이전의 제작자들은 극장주에게 선금을 받아~~포켓 머니로 챙기고~~ 질 낮은 상영물들을 만들어 대충 극장에 걸었으나, 영화시장 개방 이후로는 그런 대충대충 식 제작으로는 수익도 낼 수 없고 차기작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한국 영화 상향 평준화에 일조하게 되었다. 옛날 제작자들이 좋았지~하며 배부른 소리 하는 이들이 가끔 있는데 사실 이것이 옳은 흐름이다. 그리하여 [[1999년]]에는 《[[쉬리(영화)|쉬리]]》가 《[[타이타닉(영화)|타이타닉]]》을 꺾는 대흥행을 기록했고, 이후로도 여러 국산 영화들이 유의미한 흥행을 기록하며 한국 영화계의 패배주의를 깨끗이 쓸어버림과 동시에 당해 점유율도 39.7%를 기록하며 한국 영화 부흥의 첫 삽을 떴다. 특히 쉬리는 '''"한국 영화계의 역사는 쉬리 개봉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고 할 정도로 한국 영화사에 영원히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실제로 쉬리의 대성공 직후부터 여러 제작사들이 영화 산업에 뛰어들면서 한국 영화는 르네상스를 맞이하였고 그 질과 양이 과거와 비교도 안 되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급격한 세대교체와 영화계 재편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직도 [[1960년대]]의 정서에 기대고 있던 자칭 영화계 주류층이 [[애니깽 사태]]라는 깽판을 치기도 했으나, 이들이 만들었던 진부한 영화들은 대중의 혹평과 자본의 무관심 속에 연달아 흥행에 참패하면서 세대교체의 흐름만 가속화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